D씨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잘생겼고, 미혼이며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보다 단지 몇 살 위라는 사실 때문에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었죠. 그가 자동차를 좋아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 학교에서는 D씨가 구입한 고성능
자동차들 중에서도 가장 멋진 포드 무스탕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차에 대한 수요가 워낙 많아서 그 지역의
판매 대리점이 그가 주문했던 그 모델을 가져오는 데 추가로 몇 주가 더 소요된다는 점 때문에, 학생들은
D씨만큼이나 실망이 컸습니다.
결국, 그 차가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멋진지요! 빨간색이 찬란하게 빛나며,
크롬 범퍼의 광택은 화려했으며, 매끈한 라인, 공기역학적인 설계; 그것은 분명 속도를 잘 내기 위해 만들어진 고성능 차였죠.
수업이 파하고, 학생들이 그 차 주변에 모여들었고, D씨는 차에 대한 자랑을 늘어 놓았죠: 엔진 소리, 급커브에서
핸들링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시속 100마일에 얼마나 빨리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요. 가장 좋았던 것은, D씨가 그 차를 뽐내기 위해
자유 시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을 그 차에 태워줬던 겁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가능 즐거웠던 기억들 중 하나가 그 선생님의 차에 시승했던 거예요. 나는 그 차에 마지막으로 시승했던 학생들 중 하나였어요. 왜냐하면 나는 D씨의 자유 시간에 수업이 있었거든요. 마침내 어느 날, 나는 그 선생님 수업을 들은 후, 선생님과
함께 차로 달려가서 올라 타고, 마을 외곽의 길고도 쭉 뻗은 도로로 향했어요. 선생님은 다시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멈추고, 돌린 후에, 우리를 바라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죠. “너희들 준비됐니?”
“네 준비됐어요!”
선생님은 엔진 출력을 높이며, “도로에
타이어 자국을 냈어요.” 몇 초 만에 우리는 시속 115마일
(185킬로)로 날았습니다.
– 그 당시 그 도로의 법정 제한 속도가 시속 55마일 (88킬로)에 불과했었는데 말이죠! 그 불법적 모험의 스릴을
마치고, 선생님은 내가 수업에 10분 늦었다는 사실도 용서 받게 해줄
허가증까지 적어줬답니다! 1
그런데 비극이 찾아 왔어요. 여름
방학 한달 전쯤에, 누군가가 선생님의 무스탕을 훔친 거예요. 모든 학생들이
당황했죠. 선생님보다 더 당황한 사람은 없었지만요. 그가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했던 그 차가, 그렇게도 기다리고, 많은 돈을 투자한
(아직도 지불해야 할 잔금이 많이 남았는데) 그 차가 사라진 거예요!
경찰에 신고하고, 보험 회사에 많은 서류를 제출하고, 마을 이곳 저곳에 공고문을 붙이며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차를 찾을 수
없었어요. 선생님의 기쁨만큼이나, 그렇게 빨리 그 차가 사라진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그 차가 불법으로 차를 분해하여 해외로 팔아 넘겨진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죠.
학기는 마쳐졌고, 무스탕은
결국 못 찾았어요.
학기가 다시 시작됐을 때, 우리
모두는 선생님이 새로운 차를 구매했는지에 대해 몹시 궁금했었죠. 아니었어요. 선생님은 무스탕을 구매하기 전에 타고 다녔던 그 오래된 구닥다리 차를 몰고 왔어요. 선생님은
무스탕을 잃어 버린 것에 여전히 마음이 쓰라린 상태였죠.
학기가 시작되고 6주 되었을
때, 선생님에게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경찰이 마침내 그
차를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슬픈 소식은 그것이 200마일 떨어진 한
도시의 폐차장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자동차 등록 번호를 조회했을 때, 작업자들이 그 차가 도난 당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전화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폐차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의 눈에 얼마나 슬픈 장면인가요! 소중하게
여기던 차가 폐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쪽 거울이 부러졌고, 다른 쪽은 통째로 없어졌습니다. 앞 유리와 옆 유리가 깨졌습니다. 부주의하게, 어딘가에 부딪히고, 심하게 다루어서 옆면들이
움푹 들어갔습니다. 선생님이 엔진을 보기 위해 후드를 올리려고 했을 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후드가 너무 많이 찌그러지고 금이 가 있어서, 들어 올리는 것이 불가능했던 거죠.
다음날, 그 선생님이
그 폐물 덩어리를 다시 가져오기 위해 돈을 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을 때, 우리는 크게 분개했습니다!
결국, 그 차는 선생님 것이 되었지요! 본래
그의 것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레카 비용 200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볼 때 매우 부당해 보였죠.
그런데 그는 그 값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가 그 차를 차량 외형 수리 업체에 가지고 간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차의 외장을 수리하려고 했던 것이죠! 왜 그
선생님은 새로운 차를 사지 않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을까요. 선생님은 그 차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오직 그 차만이 그가 원했던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수리 작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 자동차 수리업체는, 그 차의 찌그러진 부분에 있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수리하였고, 수리할 수 없는 부분은 교체하였죠. 차의 내부는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운전자석은 통째로 교체해야 했습니다. 다른 자리들은 천갈이를 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그 수리업체에서 차를 가져가도 된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 . . 그 차가 서 있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빨강색으로 화려하게 빛나며, 크롬
범퍼에서는 멋지게 광택이 나며, 매력적인 라인과, 공기역학적인 설계;
그것은 빠른 속력을 위해 만들어진 고성능 자동차처럼 보였죠. 그리고 그가 후드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가 바라본 장면은 다 큰 성인 남자를 울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외관의 아름다움만으로 운행할 수는 없었어요. 아직 끝나지 않은 거예요.
선생님은 그 차를 차량 내부 수리 업체에 가지고 갔고, 수리 작업이 또 다시 진행되었습니다. 새로운 엔진이 필요했고, 다른 부분들도 많이 수리해야 했습니다. 많은 부품들이 주문되어야 했기 때문에, 몇 개월이 걸리는 작업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봄날, 선생님은 자랑스럽게 그 무스탕을
학교로 몰고 왔어요. 그것은 아름다웠습니다! 새로운 도색 작업으로,
그 흐르는 윤기는 이른 아침 햇빛과 함께 빛났죠. 화려하게 빛나는 그 범퍼의 광택은
주변에 모여든 학생들의 얼굴을 비칠 정도였죠. 그 차는 다시 한번, 분명 속도를 위해 만들어진 고성능 자동차가 된 것이에요. 재미있게도, 선생님은 전보다 더욱 그 차를 사랑했어요. 폐차장에서 다시 그 차를 가져와서 그
차의 이전 영광으로 회복시키는 데에 많은 시간, 노력, 슬픔,
추가 비용이 들었지만, 그 차는 이전보다 더욱 그에게 소중한 차가 된 것이에요!
두 학기에 걸쳐, 나의
눈 앞에 펼쳐졌던 이 드라마는 어린 나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죠. 자동차 하나에 대한 그 애착의 정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외에도,
나는 그 선생님이 그 차에 왜 그렇게도 많은
추가 시간과 돈을 아낌 없이 쏟아 붓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냥, 다시 시작하면 안되나요? 여러분이 그것을 고치는 데 많은 돈을 들여야 한다면,
그냥 새 차를 사는 게 낫지 않아요?
내가 나이가 들어 가면서, 나는
왜 그 선생님이 그 차를 소중하게 회복시켜서 다시 갖기 위해 그러한 희생들을 들였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그것은 그냥 일반 차가 아니고, 그의 차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차가 도난 당했었지만, 그 차는 여전히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그 폐물 덩어리를 가져 오기 위해 200불을 기꺼이 지불했던 이유죠. 그는 그 차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을 대신한 다른 차가 그 차와 같은 것이 될 수 없었던 겁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야후와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었을 때, 그분께서는 매우 쉽게, 그냥 다시 시작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과 루시퍼와 그의 천사들을 존재하지 않도록 없애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그 거룩하고 타락하지 않은 존재들의 마음들로부터 그들의 기억을 지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분은 창조주셨습니다! 누가
그분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그분은 알 것이었죠.
창조주에게는 새로운 인류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망가진 것을 구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단했겠죠. 그러나 그분은 구원의 과정을 선택했습니다.
야후와께서는 자신에게 어떠한 대가가 따르더라도 그 죄를 범한 인류를 구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버지와, 목적에 있어,
사랑에 있어, 하나이셨던 그분의 아들이 그 대가를 치르는 결정에 동의하셨습니다.
두 분이 언약에 대한 동의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죄를 범한 인류가 포기되거나 교체될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구속될 것이었고, 구속된 후에는, 창조주께서 다시 기뻐하실 수 있도록 회복될 것이었습니다.
신성의 사랑은 사람이 구속될 수 있는 한 계획을 만드셨다. [야후와]의 깨어진 율법은
그 [율법을 깨트린 자들]의 생명을 요구하였다. 전 세계에서, 그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 조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이 오직 한 분 계셨다.
그 신성의 율법이 [야후와] 자신만큼이나 성스러웠기
때문에 . . . [야후와]께서 그 범죄를 위해 속죄를 이루실 수 있으셨다.
[그 아들]외에는 누구도 타락한 사람을 그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여 그를 하늘과
다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만들 수 없었다. . . . [그 아들]은 죄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자신 위에 올려 놓을 것이었고—죄는 . . . 거룩하신 [엘로아]께 너무도 혐오스러운 것이어서 그것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을 갈라 놓아야 했다. . . . [구주]께서 망가진
인류를 구출하기 위해 비극의 깊음에 이르러야 할 것이었다. 2
이것은 지극히 값진 임무였다! 신성의
율법, 사랑의 율법은 완벽하여서 변경될 수 없었다. 율법의 요구들은
단순하고 명확하였다: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
구조: “(버려진 것, 파손된 것 등을) 구하는 것 … 회복시키는 것 … 소용되게 하는 것” Webster’s New Universal Unabridged Dictionary |
인류를 “구조”하기 위해, 그들은 먼저 구속되어야 했다. 구속이 의미하는
것은 “다시 구매하는 것; 몸값을 치르고 되찾는 것; 포로 또는 속박, 또는 어떠한 의무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거나 구출하는 것,
지불되어야 할 구속의 값은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22)
야후와의 아들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야후와의 위대한 어린양이셨다. (요한복음 1:29 참조)
전능하신 분의 그 아들은 인류의 구주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타락한 인류를 사망으로부터
구속하기 위한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구주께서는 그분의 죽음이 구속을 이루는 값이라는 것을 아셨다.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다 그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 27, 28)
구주께서는 죽음을 단지 잠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분께서는 그를
부활시키고자 하시는 그분의 의도를 제자들로 알게 하시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자는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요한복음 11:11) 생명을 시여하신 분에게, 죽음은 그저 노동으로부터 쉬는, 잠일 뿐이다. 구속의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야후와의
자녀들에게 죽음은 그저 잠일 뿐이다.
이것은 메시야가 죽으신 그 죽음이 아니다. 구주께서는 그분의 구원의 초청을 거절한 모든 자가 죽어야만 하는
“둘째 사망”으로 죽으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분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십자가 상에서의 정신적 고통이 매우 크셨던
것이다. 둘째 사망은 완전한 것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야후와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다. 그분의 입술로부터 괴로움에 짓눌린 외침이 흘러 나왔다. “나의 엘이여! 나의 엘이여! 어찌하여 당신께서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참조) 십자가에서, 구주께서는 이제까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게 될, 모든 각 개인에 의해 행해진,
모든 죄에 대한 죄책감의 무게를 담당하셨다.
죄가 없으신 그분께서, 그분을
통하여 야후와께 합당하도록 회복될 수 있는 그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분의 부활은 그분께서 죄 없는
삶을 사셨다는 증거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모든 자는 살게 될 것이라고 신성의 율법이 공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들의 구주를 신뢰할 모든 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그분 안에서 “잠든다”면 그들 역시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하나의 확증이다.
그러나 구원의 과정이 끝난 것은 아직 아니었다. 구속의 값은 치러졌으나, 그 다음 단계는 회복이었다. 그 선생님이 그 폐차장에 200불을
지불하고 값을 치렀지만, 그 차는 아직 운행할 수 없었다. 그가 그
무스탕을 다시 즐길 수 있기 전에, 그것은 고통의 과정을 통해 온전히 회복되어야만 했다. 처음에, 그 선생님은 엔진을 보기 위해 그 후드 속을 볼 수 조차 없었다. 자동차 외부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했다.
인간의 삶에도 이것과 동일한 면이 있다. 종종
구주께서는 사람의 외적인 부분에서 먼저 작업을 하실 것이다. 마음을 어둡게 하는 술, 마약, 담배, 영화, 음악, 소설과 같은 일상 생활의 죄들에 대한 집착이 먼저 깨끗이 청소되어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마음이 깨끗해져서 회복 과정의 그 다음 단계로 나갈 준비가 된다. 그
과정의 다음 단계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한한 인간의 마음으로 구속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의 신비는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진 자는 그것이 신성의 실제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여기서 개인적
경험을 통해 구속의 시작을 알 수도 있다. 그것의 결과는 영원까지 미친다.4
인간의 회복 과정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구주께서
이것을 바람과 연결 지으셨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느껴질 수 있고 그 영향은 보여질 수 있다.
바람 그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보여지고 느껴지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한 영혼에 역사하는 그 영의 역사는 그 구원의 능력을 감지하는
그의 모든 행동에서 드러날 것이다. [야후와]의 영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그것은 그 삶을 변화시킨다. 죄스런 생각들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들이 끊어지며; 사랑, 겸손과 평안이
분노, 질투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의 자리를 대신하고,
그 표정은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 아무도 짐을 덜어주는 손을 보지 못하며,
하늘의 궁전에서 내려오는 빛도 보지 못한다. 축복은 그 영혼이 믿음으로 자신을
[야후와]께 복종시킬 때 임한다. 그 때에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능력이 [야후와]의 형상으로 새로운 존재를
창조한다.5
창조주께서는 심오한 진리를 아셨다. 회복이 없는구속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다. 타락한 인류가 창조주와 다시 하나됨을 누리기 위해, 그 안에 있는 마음이 모든 죄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 그 마음 자체가 재창조되어야 아버지의
형상이 그 영혼 안에 다시 머무를 수 있다.
이것은 누구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야후와의 아들을 믿음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누구라도 그분의 공로에 의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은 다음 구절과 같이, 믿을 모든
자에게 주어졌다:
내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리라. 또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하여금 내 법규 안에서
걷게 하리니 너희가 내 판단의 법도를 지켜 행하리라 . . .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엘로아]가 되리라. 내가 또한 너희의 모든 부정함에서
너희를 구원하며. (에스겔 36:26-29)
구원의 계획에는 한 영혼을 위해 지불된 구속의 값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포함된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 안에 신성의 형상의 전체적인 회복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구속 받고 회복된 영혼은 그가 타락하지 않았던 때보다, 신성과 더욱 가까운
관계로 들어간다. 왜냐하면 구주께서 인간의 몸을 취한 바 되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인류와 하나인 상태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아들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이는
구주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야후와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누가 야후와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무슨 일로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야후와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아니라!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분의 아들 우리 구주 안에 있는 야후와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 (로마서 8장 참조)
야후와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 . . 그분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사람의 정확한
형상이시며 그분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치시는 이 아들께서 . . . 천사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게
되신 것은 그분께서 상속을 통해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이라.”
(히브리서 1:2-4)
야후와의 독생자의 이름은 매우 특별하며 중요한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그 아들께서 상속에 의해 천사들보다 더 훌륭한 이름을 받으셨다는 바울의 요지에 의해 강조된다.
무언가를 상속 받는다는 의미는 “조상으로부터
선천적으로 받는 것, 아들은 아버지의 품성들을 물려 받는다 . . . .”6
구주께서는 야후와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은 다른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상속
받으셨다.
구주께서 태어나시기 수 세기 전, 야후와께서
그 확증으로 모세에게 용기를 돋우셨다:
보라, 내가
한 천사를 네 앞에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게 하며 내가 예비한 곳으로 너를 데리고 들어가게 하리니, 그에게 주의하여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라 . . . 이는 내 이름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라.” (출애굽기 23:20-21)
영원한 아버지 야후와의 이름이 그 아들의 이름 안에 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녀의 아들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 것인지를 지시할 신성의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리고 그 기별자, [천사]가 그녀에게 와서 말했다. “큰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우리의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니 네가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
그녀가 그를 보고 그가 하는 말에 불안해하며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인사인가?”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니,
그 천사가 그녀에게 이르되,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야후와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네 태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야후슈아라 하리라. 그가 크게 되고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요, 주 야후와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시리라. (누가복음 1:26-32 참조. 아람어 영어 신약 성경7)
아버지 자신의 개인적인 신성의 이름과 함께, 아들의
이름의 중요성이 그 이름의 정의에서 발견된다.
구주의 이름 안에 담긴 아름다운 뜻이,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능력의 구원의 계시들을 모두 포함한다. 야후슈아라는 이름의 뜻은:
- 야후와여 구해주소서! (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것)
- 야후와께서 구원하신다! (현실의 기쁨의 상태)
- 구원하시는 야후와 (즉각적인 조치의 현재형)
- 야후와의 구원 (구주께서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시는 지에 대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상태)
죄인을 구하기 위한 계획은, 나중에
생각하신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타락 후 즉석에서 떠 오른 “갑작스런 영감”이 아니었다. 구원의 계획은 지난 시대들로부터
고요하게 지켜져 온 비밀을 밝혀 주었다. 이 비밀은 죄가 발생할 것인데, 아버지께서 그분의 피조물들을 구하시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 쪽에서의 자기 희생이 필요했다.
그 구속의 계획은 모든 자가 구원 받는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았다. 그것은 죄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지, 그들에게 그 구원에 대한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야후와께서 사람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값을 매길 수 없는 그러한 귀한 선물을, 어느 누가
선택할는지에 대한 아무런 보증도 전혀 없이, 아버지와 그 아들께서 그분들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죄를 범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언약에 대한 동의로 들어가셨다.
구주의 이름 자체가, 그 선물을
믿고 받아 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격려가 된다. 그것은 믿음을 북돋우어 준다: 야후와께서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그분께 오는 모든 자를 힘을 다하여 구원하신다.
구주의 이름의 중요성이 사도행전 4:12에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이것은 심오한 말이다!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도는 구주의 이름의 중요성을 명확하게 이해했다:
그분에 대하여 모든 대언자들도 증언하되,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10:43)
그러므로 [야후와]께서도 그분 [야후슈아]를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야후슈아]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또 모든 혀로 [야후슈아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주]라고 시인하여 [야후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9-11)
그분의 명령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아들 [야후슈아]의 이름을 믿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주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요한일서
3:23)
그러한 엄청난 중요성이 그 거룩한 이름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사탄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그 이름을 숨기기 위해 연구했다.
“예수”라는 이름은 몇 개의 다른 언어들에서
그 이름을 음역하기 위한 시도들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히브리어나 아람어 신약 성경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이름으로서 “야후슈아”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것이 구약 성서에 기록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다. “여호수아” 자체도 “야후슈아”에 대한 정확한 음역은 아니지만, 그것은 “예수”보다는 훨씬 가깝다! 구주의 이름을 조사하면서, 처음 깨닫게 된 것은 히브리어에는 “J”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철자는 영어에서 조차도 비교적 근래에 생긴 것이다.
여호수아(Joshua)와 예수(Jesus)라는 이름들에
영향을 끼친 “J”가 영어에 들어 온 것은 17세기로서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I와 J사이의 차이점을 만든 영어로 발간되는 첫 책이
1634년에 출판되었다. 그것이 영어 알파벳에 추가되었으며, 26개의 철자들 중 마지막이었다. 그 전까지는, 철자 “I”가 사용되었고, “Y”로 발음되었다.
할렐루야(hallelujah)라는 단어는 이 철자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노아 웹스터가 19세기 초에 그의 사전을
기록했을 때, 비록 그 당시에 그것이 이미 J로 쓰여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 단어를 HALLELUIAH로 철자하기를 고집했다. 그 단어는 “야께 찬양(Praise be to Yah) 또는 “야를
찬양하라(Praise ye Yah)”를 의미한다. 웹스터는 그 단어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단어는 적절하지 않게 j로 쓰여진다. 그것은 j가 y의 소리를 가지는 독일과 다른 대륙어에 순응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j의 영어 발음으로 그 단어를 발음하는 것은 그
단어의 아름다움을 깨트린다. 제호와(Jehovah), 조단(Jordan), 조셉(Joseph)의 j 소리에 대한 이와 같은 실수는
여호와(Yehovah),8 요단(Yordan), 요셉(Yoseph)이었던 그 정확한 발음을 왜곡시켰다. 이 왜곡을 이제는 따라갈 수 밖에 없지만, 할렐루야(Halleluiah)에서 만큼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9
야후슈아(Yahushua)에서 예수(Jesus)로의 변형은 여호수아(Joshua)라는 이름이 되게 하는 그리스어를 조사할 때 발견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여호수아는
히브리어로 야후슈아와 같은 이름이다. 구약 성서가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그리스어 번역자들은
여호수아/야후슈아라는 이름을 음역할 때 문제에 봉착했다. 그리스어에는
없는 Y(야)와 Sh(쉬)
두 개의 소리가 그 이름에 있었던 것이다.
가능한 그 이름에 가깝게 하면서도, 그리스어를
쓰는 그들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시도로서, 그 이름이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철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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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철자들을 사용하여, 그것이
예수스 IESOUS (ee-ay-soos)가 되었다. “우아(ua)”가 그리스어로 음역될 때 그것이 여성 단수 어미였다는 사실이 그 이름이 변경되는 것에 역할을 했다. 이것은 그리스어 독자들에게 혼돈을 야기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어에서 여자의 이름이 되기 때문이었다! 남성을
위한 대부분의 그리스어 이름들이 S로 끝난다:
아킬레스(Achilles)
레오니두스(Leonidus)
이카로스(Icarus)
에레보스(Erebus)
헤르메스(Hermes)
아이네아스(Aeneas)
래르테스(Lærtes)
아폴로스(Apollos)
프로테우스(Proteus)
아리스테데스(Aristedes)
율리시스(Ulysses)
미다스(Midas)
미노스(Minos)
오디세우스(Odysseus)
그 이름의 변경된 형태는 이교도 작가들로 하여금 예수스(Iesous)라는 그 이름이 실제적으로 그들의
마귀 신 제우스(쥬우스Zeus)와 같다고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정말로
우리는 제우스(Zeus)와 예수스(ee-ay-soos) 사이에 비슷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들의 두목 신이었고 그의 이름은 종종 이름들과 지역 명에 그를 기념하기 위한 방식으로 포함되었다.
수스(sus), 세우스(seus)
그리고 수우스(sous)로 끝나는 것들은 이 이교 신의 표음식 발음들이다.
그 신산, 파르나소스(Parnassus)도
오디세우스(Odysseus) 영웅과 더불어, 두 이름 다 그런 철자들로
끝난다. 제우스의 두 아들의 이름도 역시 그들의 아버지를 높이는 그러한 철자들로 끝난다. 그들의 이름은 디오니소스(Dionysus)와 페르세우스(Perseus)였다.
그리스어가 라틴어로 번역될 때, 그 이름은
예수스로 훨씬 더 훼손되었다. 라틴어에서, 남성 단수형은 “우스(us)”로 끝난다. (이것이 라틴의 남자 이름들에서
보여진다: 클라우디우스(Claudius), 아우구스투스(Augustus),
아우렐리우스(Aurelius), 마르쿠스(Marcus) 등.) 예수(지저스 Jesus)의 라틴어 형태는 1560년에 인쇄된 한 영어 성경에서 사용되었다. 그것이 예후스(Iefus)로 철자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제로 라틴어 형태 예수스(Iesus)라는 것에 주목하라.
고대 영어에서, 철자 s가 단어 안에 포함될 때, 가로획이 없이 현대의 f와 놀랄 만큼 비슷했다.
21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스께
이르되(said), 주여,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
하니
22 예수스(Iefus)께서 그에게 이르시되(said),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 것을 내가 원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어떤 언어들은 그 라틴어 형태를 취해서 그것을 예수 Jesu (yay-zoo) 또는 예수스 Jesús (hay-soos)라고 철자했다. 그 성스러운 이름의 이러한 왜곡들의 문제는 그 이름들 속 그 어디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후와의 이름이 그분의 아들의 이름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한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 이름을 알아야 한다. 그 이름은 예수가 아니라, 야후슈아다.
야후슈아께서 그분의 이름의 중요성과 그분의 사명에 관해 그 이름에 함축된 모든 것이 바로 잃어버린 자를
구하기 위한 것임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가 나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그를 받아들이리라.” (요한복음 5:43)
메시야에 관한 이사야의 유명한 예언으로, 그는
말했다: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임마누엘”은 문자 그대로 ‘야후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를 의미한다. 이것이 무한하신 분의 신성의
아들 야후슈아께서 아담의 모든 아들과 딸에게 어떠한 분이신가를 나타내준다.
야후슈아는 그분의 아버지의 품성의 체현 그 자체이시다. 그분께서 땅에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야후와께서 우리의 모든 시험들과 슬픔들을 아시고 동정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죄인은 창조주께서 그
죄인들의 친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원의 그 위대한 계획을 통해, 모든 능력이 있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어디에나 계시는 야후와께서 사랑의 엘로아로서 드러나셨다. 야후와에 대항한 사탄의 고소는 인류를 위해 죽으시는 그분의 독생자라는 선물 안에서 잠잠하게 된다. 그 아들 안에서, 모든 사람은 아버지의 사랑을 볼 수 있고 영원한 세대에 걸쳐 그 구속 받은
자들은 그분의 무한하신 선물에 대하여 야후와를 찬양할 것이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야후와”
야후슈아는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신 야후와이셨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야후와와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엘로아이셨더라.
바로 그분께서 처음에 야후와와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1-5)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아름답고 탁월한 말씀은, 인류의
구주의 본성과 사명을 밝혀준다. 그것들은 야후슈아의 선재와 창조 역사 안에서 영원한 아버지와의 연합을 보여준다.
신성의 이름들을 연구하는 것은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요한의 말씀의 선택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와 그분의 아버지 둘 다에게, 그분이 누구이며 어떠한 분인지, 그 아들의 본질 자체를 소중히 보호하기 위해 요한은 그분을 “그 말씀”으로 묘사했다.
말은 대화를 위해 필수적이다. 말 없이
진실되고 정확한 대화가 가능하지 않다. 미소, 표정, 손짓은 그저 어느 정도의 역할만 할 뿐이다. 자세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말은 필수적이다.
말은 생각을 표현한다. 이것이,
요한이 야후슈아를 “말씀”이라고 부른 이유다.
영원한 과거의 날들로부터, 야후슈아께서는 그분의 아버지와 하나이셨다.
그분은 야후와의 위대한 형상, 그분의 위엄, 그분의 영광, 그분의 선하심,
그분의 형상 그 자체였다. 야후슈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품성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아들은 자신의 삶으로 야후와의 생각들과 감정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이사야서에 예언된 대로, 그분은 문자 그대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야후와”가 되기 위해 오셨다. (이사야
7:14; 마태복음 1:22, 23)
우리와 함께 거하기 위해 오심으로써 . . . [야후슈아께서] 사람들과 천사들 모두에게 [야후와]를 드러내실 것이었다. 그분은 [야후와 –
그분의] 생각이 들려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말씀이었다 . . . 제자들을 위한 그분의 기도에서 그분은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였나이다”—“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오래 참으시고, 선하심과 진리가 충만하신 이름”—“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옵시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 구원의 계획이 그분의 땅의 자녀들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이 작은 세상은 전 우주의 교과서이다. . . . [야후와]의 은혜의 놀라운 목적, 구속의 사랑의 그 신비가
“천사들이 보기 원하는” 주제이며 그것이 끝없는 시대를 걸쳐 그들의
연구 주제가 될 것이다. 구속 받은 자들과 타락하지 않은 존재들 모두 그 십자가 안에서 그들의 과학과 그들의
노래를 찾을 것이다. [야후슈아]의 얼굴 안에서 빛나는 그 영광이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영광임이 보여질 것이다. 갈바리의 빛 안에서, 자기를 포기하는 사랑의 법이 땅과 하늘을 위한 생명의 법이라는 것이 보여질
것이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그 사랑이 [아버지]의 마음 안에서 나왔다는 것과; 온화하고 겸손한
분 안에 있는 그것이, 어떤 사람도 접근 할 수 없는, 빛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품성을 증거한다는 것이 보여질 것이다. . . . 10
아버지가 그분의 아들 안에서 나타나신다. 야후슈아를
바라봄으로, 야후와 아버지 안에 있는 생각들과 감정들이 순수한 사랑과 박애, 인내, 친절, 오래 참으심 그리고 모두에 대한 자비가
되기 위해 보여진다. 만약 아버지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분의
영광을 감추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의 삶을 사셨다 할지라도, 구주의 삶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기록이 전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아들의 모든 행동에서, 그가 가르쳤던 모든 교훈들에서, 친절하고 용서하시는 말씀과 행동들에서, 우리는 아버지를 보고 들을 수 있다. 모든 면에 있어, 그 아들의 삶은, 만약 아버지께서 인간이셨다면 어떠하셨을 지에 대한 것들을 나타내준다.
야후슈아는
살아계신 [야후와]의 독생자이시다. . . . 그분은 생각이 들려질 수 있도록 . .
. 그 생각을 표현해주는 말씀으로서 . . . [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야후슈아]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분의 말씀은 [야후와의] 말씀의 메아리였으며 . . . [그 아들]은
[그분의 아버지]의 닮은꼴이었고, 그분의 영광의
밝음, 그분의 사람의 정확한 형상이셨다. . . .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서,
[야후와]께서는 자신을 그의 아들 [야후슈아]로 나타내셨다.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로서, “그분의 사람의
정확한 형상”으로,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이 땅에 나타나셨다.11
이 값진 구원의 목적은 죄로 어두워진 마음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의 품성을 밝혀주는 것이었다. 죄가 들어 온 후, 인류는
더 이상 야후와의 무한하시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품성을 분별할 수도, 심지어 이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신성의 품성이 두려운 것으로 비추어졌다. 구주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고 살기 위해 오셨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아름다운 모든 품성은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그분의 아들을 통해 나타난다.
친절한: “다른 사람들에게 선하게 행동하고, 그들의
부탁들을 들어 주고, 그들의 필요들을 공급하거나 고통 중에 있는 그들을 도움으로써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마음; 상냥함과 선량함을 갖는 것.”12
자비로운: “호의적인, 친절한, 친근하게 . . . 자애로운; 범죄들을 용서해주는 마음과 공로 없이 얻은 축복들을 나누어 주는 것.”13
자애로운: “선하게 행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 인류에
대한 사랑을 품는 것, 그리고 그들의 번영과 행복을 촉진시키려는 바램.”14
동정심: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통 당하는 것, 고통스러운 공감;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불행에 대해 느껴지는 슬픔의 마음; 연민; 긍휼.”15
Pity: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 대해 고통이나 슬픔을 느끼는 것; 누군가에
대한 부드러운 감정을 갖는 것, 그의 불행에 대해 동정심을 갖는 것.”16
자비: “상처들을 바라보며 갖게 되는 마음의
자애, 온순함 또는 부드러움, 또는 범죄자에 대하여 그에게 마땅한 것보다
더 잘 대해주는 것; 공정하게 행하는 마음, 그리고 상처 받은 사람에게
죄들과 상처들을 용서하라고 설득하는 마음, 그리고 처벌하기를 참는 것.”17
이렇게 아름다운 신성의 품성이, 간음
중에 잡혀 심판을 위해 야후슈아께 끌려온 여자의 이야기에서 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지는 곳은 없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녀는 죄를 지었다. 그녀는 현장에서 잡혔다!
그녀를 그분 앞에 끌고 온 사람들이 그녀가 무슨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 힐문했을 때, 구주께서는 만약 야후와께서 거기에 서 계셨더라면 행하셨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응답하셨다. 하늘의
왕께서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하신 듯 몸을 구부리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 이에 그들이 계속해서 그분께 물으니 그분께서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구부리시고 땅에 쓰시니라. 그들이 그것을 듣고는 양심에 가책을 받아,
나이가 가장 많은 자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매 오직 [야후슈아]만 남았고 그 여자는 한가운데 서 있더라. (요한복음 8:6-9)
자비로우신 구속주! 왕이요
사랑의 구주시라! 연민을 가지고 그녀의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눈을 바라보시며 그분께서 물으셨다: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요한복음 8:10) 그녀의 연약한 육체에 날라올 단단한 돌멩이를 기다리며,
공포 속에 울고 있던 그녀는 대답했다. “아무도 없나이다. 주여.”
그리고 아름다운 말씀이 야후와의 심장으로부터 곧 바로 내려와 그녀의 귀에 들렸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요한복음 8:11)
여기에 회복의 두 가지 계획이 드러난다:
1. 야후와께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마음이 무한하신 그분의 사랑으로 이끌리기를 바라신다.
2. 창조주의 명령은 권능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그분의 명령에는 회개하는 죄인으로 하여금 신성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게끔 하는 힘이 포함되어 있다.
야후와를 아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임이 신성의 원칙이다. 그리하여, 죄인들에게 신성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들이 결국 그분께로 이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빛 [야후슈아]께서 그분의 신성의, 눈 부신 화려함을 벗고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 오셨다.
. . . [야후슈아]께서는 [아버지]께서 사람들이 알기를 바라시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오셨다. 하늘 위에서, 땅에서, 대양의 광활한 바다에서, 우리는 [야후와]의 손이 하신 일들을 볼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분의 능력, 그분의 지혜, 그분의 사랑을 증거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의 인격을 별들이나 대양이나 큰 폭포로부터 배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나타나기
때문이다.18
신성의 사랑의 계시에 의해, 마음들이
그 신성의 마음으로 이끌렸고 신성의 형상으로 회복되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복종하는
그 무한한 굴복의 점진적인 과정이 성경에 서술되어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그것은 [야후슈아]
안에도 있던 것이라. [야후와]의 형체로 계시는
분으로서, [“(야후와의) 동등한 분으로서의 그분의 특권을 고수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그러므로 [야후와]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 . . 모든 무릎이 [야후슈아]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또 모든 혀가 [야후슈아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야후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5-11 J. B. Phillips 번역 일부 참조)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지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의 품성의 계시가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고집스러운 뜻을 그 신성의 뜻에 기꺼이 내어드리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품성이 아들의 삶에서 보여질 때 사랑이 두려움을 대신하고 확신이 불신의 자리를 대신한다.
부드러움, 동정심,
연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변함 없는 배려를 지니신 그분께서 [아버지]의 품성을 나타내셨고, [야후와]와 사람을 위해 끊임없이 봉사하셨으며. . . . [야후와]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이 인간의 본성으로 계셨던 [야후슈아]와 같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분의 힘 안에서 우리는 구주께서 사셨던 순결함과 고귀함을 살아
낼 것이다.19
사랑이 두려움을 대신할 때, 약속된
재창조가 성취된다. 회복이 완성되고 그 사람은 신성의 형상을 완벽하게 반사한다. 야후와께서 구원하신다!는 약속 안에 있는, 야후와의 구원을 믿음으로 주장할 모든 사람은 온전한 회복이라는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서 시작된 그들의 구속이, 그들이 온전히 회복되어 아버지의 품성을 반사할
때 완성된다. 왜냐하면 그분의 율법이 그들의 심장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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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이야기는
용납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요즘 그런 행동을 하는 선생님은 아마도 해고 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나의 가장 재미있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들 중 하나로 남아있다!
2 E. G. White, 부조와 선지자, 63쪽.
3 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Noah Webster, ed., 1828.
4 E. G. White, 시대의 소망, 173쪽.
5 Ibid., pp.
172-173.
6 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Noah Webster, 1828.
7 아람어 영어 신약 성서(The Aramaic English New Testament)는 메시야의 이름을 Y’shua로 소개한다.
“Y’shua” 는 사실 야후슈아의 단축형이다. 야후슈아(Yahushua)가 더 정확하다.
8 이와 같이
V를 포함시켜서 야후와를 철자하는 것은 고대 히브리어에 관한 지식의 부족 때문이다. 히브리어에는 본래 V 소리가 없다. 그리하여 그 이름이
야호바(Yahovah)가 아니라 야후와이다.
9
“Halleluiah,” 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Noah
Webster, 1828.
10 E. G. White, Reflecting
Christ, p. 15.
11 E. G. White, Sons
and Daughters of God, p. 21.
12 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Noah Webster, ed., 1828
13 Ibid.
14 Ibid.
15 Ibid.
16 Ibid.
17 Ibid.
18 E. G. White, Sons
and Daughters of God, p. 21.
19 E. G. White, Sons
and Daughters of God, p. 21.